‘띠 라라라 라...’ 지난 4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마에스트로(maestro) 정명훈 공연 도중 난데없이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1부를 마친 후,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2부를 시작하려던 순간이었지요. 모두 집중하던 시간에 울린 벨소리에 객석이 술렁였습니다. 중요한 순간, 놀란 청중들도 당황하고 화가 나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그는 금방 울렸던 휴대폰 벨소리를 그대로 피아노 건반으로 재치 있게 재현하는 순발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청중들이 크게 환호하며 박수로 화답했지요. 그는 살짝 미소를 머금고 ”여보세요?”라고 말하며 수화기를 드는 추임새를 보인 뒤, 휴대폰 벨소리와 연주의 첫 음을 연결하며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거장(巨匠)다운 면모를 보여준 그에게 오랫동안 환호가 쏟아졌지요.
세계적인 성악가 조수미는 지난 2006년 예술의 본 고장인 파리독창회를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부음(訃音)을 들은 그는 곧바로 귀국하려 했지만 어머니가 ‘관객과의 약속을 지켜라’고 만류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공연을 했지요. 그는 공연 후, 청중들로부터 앙코르가 쏟아지자 “지금 서울에서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서 노래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네요. 아버지도 제 노래를 잘 듣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말한 뒤 아버지를 위해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열창했습니다. 혼신을 다해부른 노래가 끝난 후 청중들은 모두 일어나 10분 넘도록 기립박수를 보내며 그녀를 위로했지요. 그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그 아픔을 감추고 노래한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아카데미 감독상으로 우리나라 100년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금자탑을 이룩한 봉준호 감독은 일약 세계적인 거장(巨匠)으로 떠올랐지요.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공부할 때 “가장 개인적인 것은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늘 가슴에 새겼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 말을 하신분이 마틴 스콜세지 감독님이고 감독님의 영화로 공부했던 사람인데 같이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언급했지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감격에 젖은 표정과 함께 봉 감독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이 모습을 지켜본 영화인들은 기립박수로 화답을 했습니다. 그는 다른 감독들을 치켜세우는 겸손한 모습으로 한층 더 진한 감동을 선사했지요. 그에게 거장이란 수식어가 전혀 부끄럽지 않은 품격을 갖췄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도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지요. 그녀는 수상소감에서 “진심이 통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요즘 세상은 진심이 안 통하는 세상”이라며 “조연상을 수상한 건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절실하게 연기했다. 대본이 곧 성경 같았다”는 말은 묵직한 감동과 울림을 주었지요. 그녀의 넉넉한 몸짓과 유머는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되었고,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 커졌을 것입니다. 그녀는 여우조연상 후보로 함께 오른 글랜 클로즈를 보며 "대 배우와 어떻게 경쟁을 할 수 있었을까. 운이 좀 더 좋아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해 큰 박수를 받았지요. 50년이 넘은 연기인생과 일흔 넘은 세월의 연륜이 담긴 품격을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엔 내로라하는 수많은 고수들이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숨은 고수가 정말 많이 있지요. 나 잘났다는 사람치고 괜찮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살다보면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는 대가(大家)를 만날 때가 있지요. 이런 분을 만나면 스스로 겸손하게 낮추며 살아야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됩니다. 거장들이 보여준 품격은 그 자체로 감동이고 교훈이 되지요. 우리나라를 빛내주는 예술가나 스포츠인, 기업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박수 받는 거장은 비온 뒤 끝, 대나무 순(筍)이 솟아오르듯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생경험을 통해 쌓여진 내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아무나 되는 건 아니지요. 우리 곁에 존경받고 사랑받는 거장이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