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도발에도 단호하게 대응해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 있 거 라! 우리는 전진한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구를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전우야 잘 자라〉라는 노래 1절입니다. 애초에는 군가가 아니라 대중가요였지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후 9,28 서울 수복이 이루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 서울 명동에서 우연히 만난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이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만든 곡이라고 합니다. 원곡 가수는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으로 유명한 현인이지요. 노랫말 중 ‘적구’를 ‘적군(敵軍)’으로 대부분 알고 있지만 원래는 적군이 아니라 공산당의 개(앞잡이)라는 의미의 ‘적구(赤狗)’입니다.
제가 초등학생일 때는 즐길만한 놀이가 마땅치 않았지요. 남자는 공차기, 여자는 고무줄놀이가 고작이었을 때, 고무줄놀이를 하며 부르는 노래 중 하나가 〈전우야 잘 자라〉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노랫말에 담긴 뜻을 알면서도 고무줄놀이하며 부를 리는 없었겠지요. 그 의미를 안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1968년 1월, 북한의 무장한 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지요. 그해 4월, 향토예비군이 창설됐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어른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목총을 들고 훈련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때, 예비군 훈련 중이던 한 어른이 고무줄놀이하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호통을 쳤지요.
“너희들,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기나 해? 당장 그치지 못해!”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혼비백산,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자초지종 얘기를 들은 선생님이 6·25 때 전투를 치르다가 전우가 순직한 슬픔을 담아낸 노래라고 하자 숙연해졌지요. 지금도 저는 6·25 기념식 때, 으레 방송에서 나오는 이 노래를 듣게 되면 철없던 시절의 부끄러움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곤 합니다.
1930년생인 제 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였습니다. 황해도 구월산 전투 때에는 전우들이 죽어가는 절체절명 속에서도 통신병 임무 수행을 위해 목숨 걸고 산을 오르내렸다지요. 제가 초등학교 졸업반이던 가을, 마을 근처의 하천변에 설치한 가설극장에서 〈피어린 구월산〉이라는 영화를 상영했는데, 아버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어깨를 들썩이며 우셨습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간 형과 저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통곡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지요.
그런데요, 참전 중인 군인에게도 외박이 있다는 건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전쟁 중 잠깐 집에 들렀을 때 형이 생겼는데, 휴전을 앞두고 태어난 그 형이 지난봄 칠순을 맞았지요. 사형제가 모이면 으레 아버지가 함께합니다. 자식들과 술자리를 즐기셨던 아버지의 구월산 전투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술상 메뉴였지요. 예순둘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난 아버지 얘기를 하다가 우리 네 형제는 모두 울먹였습니다. 하늘나라로 떠나셨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계신 아버지가 절절히 뵙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6·25 한국전쟁에서는 수많은 장병과 학도의용군, 여성 자원입대자 등이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6월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6·25 외에도 전사한 장병이 참 많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발발한 제1연평해전도 그렇고, 북한의 천안 함 피격이나 연평도 포격 등으로 얼마나 많은 장병이 목숨을 잃었습니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이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북한의 공격을 포함해 그 어느 도발에도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이 이분들에 대한 보답이자 국가 수호의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