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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은 국격(國格)의 바로미터입니다.^^

홍승표 2023. 6. 16. 09:02

정 병장! 이 친구 누구야?” “이번에 새로 전입 왔는데 홍 병장님이 현역일 때, 후임병사들을 한 번도 안 때리고 제대했다는 말을 했더니 꼭 뵙고 싶다고 해서 함께 나왔습니다.”

전역 후, 직속 후임병사 면회를 간 날, 처음 보는 일병이 나왔습니다. 구타전성시대(?)에 후임병사를 한 번도 안 때렸다는 저를 보고 싶다고 해 함께 나왔다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저는 34개월 넘는 군 생활동안 한 번도 손찌검을 안 했습니다. “부대원들은 생사(生死)를 함께하는 형제들이니 존중해주고 절대 때리지 마라!”는 아버지 말씀이 가슴 속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지요. 3곳의 부시장으로 일하며 보훈수당을 조금이라도 더 올려보려고 애쓴 것도 아버지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재정 여건상 보훈수당을 넉넉하게 편성할 수 없었던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요. 그마저도 지자체마다 차이가 많이 납니다.

 

1930년생인 제 아버지는 6·25 참전용사지요. 황해도 구월산 전투를 치루며 전우들이 죽어가는 절체절명 속에서도 국군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웠습니다. 우리 4형제는 아버지에게서 6,25 전쟁을 치루며 죽을 고비를 넘나들던 무용담을 수없이 들었지요. 제가 열 서너 살 무렵, 아버지가 저의 손을 잡고 간 가설극장에서 영화 피어린 구월산을 보며 어깨를 들먹이며 우시는 바람에 덩달아 저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우시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으니 창피한 일은 아니었지요. 아버지는 참전용사수당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예순 둘 아까운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여의도는 날씨와 상관없이 늘 진흙탕 다툼이 벌어지는 시끄러운 곳이지요. 그런데 국가보훈처를 로 승격시키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반대하는 의원이 전혀 없었습니다. ‘군사 원으로 출발해 원호처를 거쳐 국가보훈처가 된 후, 차관급 처장이 장관급으로 격상되었으나 국무위원은 아니었지요. 오랜 세월 승격문제가 수차례 제기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여야 합의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건 참 잘한 일이지요. 군인이나 경찰, 소방공무원 희생 없으면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다 순직했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존중해야하는 이유이지요.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여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고 근세에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우리 땅에서 벌어졌습니다. 일본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동안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과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지요. 또한 6.25 한국전쟁 때는 한 핏줄을 이어온 형제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죽이고 죽는 역사상 최악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수많은 장병들과 학도의용군, 민간인이 고귀한 생명을 잃었지요. 그런데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던진 선열들과 보훈가족에 대한 예우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지요. ‘국가보훈 부승격이 박수 받는 이유입니다.

6·25 희생자 외에도 전사한 장병이 많지요. 2002년 월드컵 때 발발한 연평해전, 북한의 천안 함 피격이나 연평도 포격 등으로 많은 장병이 순직했거나 다쳤습니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이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이른바 민주화유공자에 비해 보훈대상자들에 대한 예우는 초라한 수준입니다. 국가보훈 부 출범과 함께 보훈대상자들의 희생에 걸 맞는 후속조치가 뒤따라야하고 그게 국가가 책임져야할 보훈'이고 국가보훈부로 승격출범한 대의명분이지요. 보훈은 책임과 존중, 기억이라는 소중한 가치이자 국격(國格)의 수준을 저울질하는 바로미터라는 걸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